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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 이치로?”

사나다의 친근한 손짓에 조금 놀라는 듯 하더니 금방 그를 쳐다보고는 그가 미처 부르지 못한 그의 이름까지를 덧붙여준다. 그러니까 사나다가 양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합장하며 웃는다. 쌍꺼풀도 모자라 눈가에 잔뜩 주름이 잡힌다. 매우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이 됐다.

. 맞아, 그런 이름일 거예요. 역시 기자누나!”

그 감독 피부가 엄청 좋았? 그런데 명함은 왜? 그 사람한테 볼일 있어요?”

대답 없이 곧장 가방 안을 뒤적거리면서 물음 가득 한 얼굴로 되묻는다. 그녀는 이미 그로부터 명함을 건네받은 듯 하다. 아마 야쿠시의 토도로키 감독이었다면, ‘명함~?’하고 길게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이상한 얼굴을 했을 게 분명하다. 단지 사나다는, 아라키 감독이 진학교의 선생이라는 것에 희망을 걸었을 터다. 그런 학교라면 명함 한 개쯤은 가지고 있을 것 같았고, 그리고 아마 이 기자라면 그것을 건네받았을 것이다.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그녀는 깔끔하게 하얀 명함 한 장을 가방 안에서 건져냈다.

아 그, 딱히 용무가 있다기보다는.”

그럼 그냥 있냐고만 물어본 거예요?”

그 쪽도 아니다. 사나다는 일단 고개부터 젓고 나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막상 무례한 부탁을 하기는 했는데 둘러댈 명분이 별로 없다. 그래도 이미 시야에 걸린 하얀 종이쪼가리가 제법 탐이 나는 터라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아뇨. 그거 나 줄 수 있어요?”

줄 수는 있지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직은 아무 일도.”

사실 앞으로도 아무 일도 없을지는 모르지만. 머릿속으로만 글자들을 나열하면서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더니 별 다른 질문을 덧붙이지 않고 그것을 건네주었다. 아마 토도로키 감독의 언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사나다는 생각보다 쉽게 그것을 손에 넣고, 다시 한 번 깍듯하고 느리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 나서 뒤를 돌아 경쾌한 걸음을 걸었다.

하지만 걸음은 금방 느려졌다. 고개를 푹 꺾고 이미 손에 묻어있던 흙먼지로 인해 지저분해진 명함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답지 않게 딱딱하고 투박한 글씨에다가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디자인의 명함을 만들었다. 심지어 메일주소라니, 우와 구식. 사나다는 길 한가운데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는 발걸음과 함께 웃음이 뚝 그쳤다. 설마 아직도 구형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인데, 이러다가 기껏 졸라 받은 명함이 아무짝에 쓸모없어 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을 얻어내기엔 무리다. 모로 보나 명함도 썩 자연스러운 그림이 아니었는데 휴대전화 번호를 묻는다면 그건 매우 해명하기 힘든 행동이었을 터다. 그리고 사실은, 그 명함이 왜 가지고 싶었는지는 사나다 본인도 미심쩍은 차 였다. 그저 기자를 보자마자 떠오른 말일 뿐이었다.

도립 오우야. 감독.”

데이터를 읽히는 것은 올해 들어 아주 빈번한 일이었는데 그와의 만남이 조금 이상했다. 아니 모양새는 결코 전례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다만 사나다는, 그 남자에게서 본적 없는 무엇인가가 뿜어져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굉장히 시각적인 동시에 운동적이었다. 마치 강한 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것이 본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인지, 아니면 평범해 보이는 그 남자가 정말로 가지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느낀, 처음의, 강한 충동인 것이다.

 

*

 

아라키 감독은 다시 한 번 엄지를 밑으로 당겨 화면을 밀어 내렸다. 손가락 움직이기를 몇 번 반복하니 다시 메시지의 맨 처음이다. 꽤나 심각한 얼굴로, 한 품에 가득 안은 쿠션에 턱을 얹은 채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다음에 만나면 명함 한 장

더 부탁드려요.

            잃어버렸나요

. 야쿠시고교 사나다군이

가져갔어요.

            사나다? 학생 말인가요?

. 그러니 다시 한 번 부탁

합니다 ;Д;

            알겠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그러도록 하지요.

 

대체 타교의 학생이 무슨 용무로 자신의 명함을 가져간 것일까. 심지어 그것은 며칠이 지난 상태였다. 경기를 바로 코앞에 두고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하기사 두 사람이 조우하여 이야기를 나눈 날로부터 지금은, 양 손 안에 꼽을 수 있는 숫자이긴 했다. 어찌되었던 간에 갑작스러운 여기자의 문자는 아라키 감독에게 꽤나 알기 어려운 의문을 남긴 것이다. 혹여 염탐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런 것이라면 그 대상은 본인이 아니어야 했다. 더군다나 이름과 메일주소, 학교의 전화번호뿐인 종이쪼가리를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심지어는 메일도 한 통 와 있지 않은 것이었다. 잠자코 앉아서 궁리해 보기를 이십여 분. 아라키는 이내 휴대폰 화면을 소파에 엎었다.

알 게 뭔가.”

좀 전과는 아주 다르게, 그의 얼굴은 금세 홀가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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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아라] 3 :: 2013. 11. 7. 00:50 2D

 

단번에 간파 당했다. ‘머리 나쁘지?’ 아마 그걸 함의하고 있을 터다. 그러나 기분 나쁘기는커녕 그의 눈썰미란 참으로 대단한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오히려 훨씬 연장자 앞에서 멋대로 웃음을 터뜨리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사나다는 똑같이 웃어버릴 것이다. 웃음은 잘 참지 못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무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장 멈추고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했다. 훈계라도 할 셈인가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의외로, 그런 건 개의치 않는 다는 얼굴로, 교설 대신-사실 그 보다는 사나다의 웃음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은 것처럼-금방 앞으로 나아갈 것 같던 몸을 완전히 돌려 사나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법 위계가 없는 감독이다. 물론 격이 없는 건 야쿠시고교의 토도로키감독에도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둘에게서 받는 느낌이란 상당히 다르다. 사나다는 내밀어진 아라키감독의 손을 잡기 위해 땀이 축축이 차오르기 시작한 손바닥을 유니폼에 문질렀다. 그 사소한 행동마저도 아라키는 빠뜨리지 않고 읽어내리는 것 같다. 정적이지 않은 그의 눈길이 다시 사나다의 얼굴로 올라왔다. 불꽃이 튀는 대신 조금 습하게 차오르던 공기가 얼었다. 그보다도 얼음장 같은 아라키의 손바닥이 닿자마자 사나다의 머릿속에는 시답잖은 생각이 둥실 떠올랐다. 손이 찬사람 마음이 따뜻하다고 했지.

좋은 손이네.”

그가 가볍게 손을 쥐었다가 놓은 것이 다가 아니다. 마지막에는 사나다의 중지가 그의 손가락에 의해 훑어졌다. 찰나여서 그저 스침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라키 감독은 묘한 표정과 말을 남겼다. 그 탓에 사나다는 혼자 동동 떨어진 제 손을 살짝 쥐고, 엄지로 그 손가락을 쓸며 그는 역시 꽤나 이상한 흐름을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라키는, ‘슈트의 흔적이 남았군.’이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그것은 딱히 사나다를 향한 말이 아니었고, 의도된 중얼거림도 아니었다. 아마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저 흘려보내는 타입 일 뿐이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다시 인사를 건넬 것 같은 얼굴이다. 이쯤에서 사나다는 또 한 가지를 생각한다. 생각보다는 말이-많은 사람이다. 그 탓에 평소와는 다르게 시끄럽고 바쁘게 사나다의 머릿속이 굴러간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 아라키 이치로 감독의 데이터를 바삐 입력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블록에서 떨어지지 말고 올라와.”

아라키는 이제 여유로워진 손으로 사나다의 어깨를 가볍게 톡 하고 두드렸다. 첫 만남에 가벼운 두 번의 스킨십이라. 마치 33연승을 셈할 때와 같이 그것은 즉각적으로 사나다의 머릿속에 들어앉았다.

라져.”

 

*

 

줄무늬가 없어질 정도로 흙바닥에서 구른 야수들보다야 훨씬 양호하지만, 조금 추워진 날씨 탓에 다리가 신경 쓰였던 것인지 연습시합 내내 삐거덕거리던 사나다 역시 결국 강습타구를 글러브에 맞으며 마운드 위에서 구르는 바람에 내내 깨끗했던 유니폼이 갈빛으로 지저분해 졌다. 비가 오지 않아 말라있던 흙먼지가 크게 일었던 탓인지 한걸음에 달려온 내야수들에게 걱정보다 더 많은 욕을 얻어먹는 바람에 뻘쭘 해 하면서 유니폼을 털었다. 토도로키 감독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고, 사나다는 그 틈에 잽싸게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 직접 맞은 것은 아니지만 손등 쪽으로 날아온 공을 쳐낸 탓에 제법 얼얼하게 울린다. 아무래도 8강 경기가 코앞이니 무리하는 것은 좋지 않겠지. 결국 타월을 던졌다. 그제야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감독은 교체를 허락해주고 크게 사나다에게 손짓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꽤나 면식이 있는 여기자가 서 있었다. 글러브를 옆구리에 끼고 부름에 달려가는 내내 사나다의 시선은 여기자를 향했다.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그녀는 16강 전 인사하던 무리와 같이 아라키 감독의 곁에 서 있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무슨 소란이냐, 사나다.”

불찰이었습니다. 글러브로 토스했어요, 하하.”

웃을 정도로 멀쩡하냐? 그럼 됐고.”

건강 체크인 것인지 눈대중으로 사나다의 왼 손을 한번 살펴 본 토도로키 감독이 벤치에서 일어나 운동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바로 괴성이 가득 터졌다. 사인은 그의 아들인 라이치에게로 내려진 참이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란 기자가 어깨를 움츠리는 것에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사나다는, 손바닥을 쫙 펴 그녀의 앞에서 팔랑팔랑 흔들었다. 조금은 들뜬 얼굴로다.

기자누나. 도립 오우야의 아라키 감독 명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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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아라] 2 :: 2013. 11. 5. 00:37 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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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였더라.”

홑꺼풀인데도 매섭지 않은 눈이 유심히 훑었으니 사나다의 머리위에는 당연히 물음표가 뜰 수밖에 없었다. 스쳐가는 한 순간이었지만 그건 분명히 유심히였다. 어깨를 부딪쳐 놓고 웃으면서 쏘리 한 마디를 한 채, 그는 금방 팔짱을 끼고 사나다를 스쳐 지났다. 그 짧은 틈에 모자까지 벗고 , 죄송합니다.’하고 사과를 한 사나다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그것이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시선이 분명하게 저를 살핀 탓이다. 사실 누구였더라도 아니고 전혀 처음 보는 얼굴이다. 도쿄도 안에 있는 오우야 고교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헌데 사나다의 머릿속에는 그의 데이터가 없다. 원래도 눈썰미가 좋거나, 기억력이 좋은 편인 것은 아니지만은. 아무리 그래도 제법 연식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으니 바가지 머리를 한 투수가 먼저 떠오를 리가 없다. 의문부호가 꽉꽉 머릿속에 차오르는 사이 그 남자가 스쳐지나가 버린 것이다. 사실 그게 누구든, 원래라면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을, 이상하게 자꾸 떠올리려 한다. 버릇대로 엄지를 윗입술에 댄 채 곰곰이 생각해 보던 사나다는 이내 뭐야 하며 고개를 저었다.

 

*

 

16강 경기가 종료되고 나오는 길에 다시 그 남자를 발견하고서야 사나다의 의문이 풀렸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그를 향해 고개 숙이는 것을 본 직후의 일이다. 그럼 그렇지 하며 손바닥을 짝 하고 맞댔다. 아라키 이치로 그 남자는 분명 사나다와 구면이었다. 몸의 부딪침 없이 눈이 맞고 나서 불현 듯, 그것이 떠올랐다. 그다지 좋은 인연은 아닌 터라 헛웃음이 터졌다. 눈까지 맞았으니 그냥 무시하는 것은 예가 아니기에 인사를 할까 생각하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제법 멀어서 또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외로, 그는 선수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사나다를 향해 걸음을 걸었다.

야쿠시 고교, 릴리프. 사나다 슌페이.”

인사할 타이밍을 빼앗긴 것은 거리가 가까워지기도 전이다.

그래도 실질적인 에이스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고.”

하하. 안녕하십니까, 아라키 감독.”

어라. 너도 날 알고 있구나?”

얼핏 이야기 하는 걸 들었거든요. , 염탐은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웅성거리는 무리 속에서 그의 이름을 들은 것은 사실 조금의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능숙하지 않은 거짓말을 한 사나다의 불안정한 시선이 그의 얼굴을 떠나 발끝부터 훑어 올라올 때 까지, 아라키쪽에서 시작된 눈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왜일까. 짧은 순간에 느껴지는 큰 부담에 사나다는 시합을 위해 풀어두었던 맨 윗단추에 손을 댔다. 그때 또 아라키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사나다로부터 반쯤 몸을 돌렸다. 별 다른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채로 곧이라도 그 자릴 떠날 생각인 것처럼.

그럼 좀 더 위에서 만나자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운이 남지 않는 목소리라고 생각하던 찰나, 아라키가 절반 남은 몸을 멈추었다.

궁금해 할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너의 슈트도 연구대상이었거든.”

익히 들었을 슈트, 그리고 새로이 던지기 시작한 커터도 그는 이미 알고 있다고. 도립고교의 정보와 분석은 제법 훌륭하며 만난다면 만만치는 않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더했다. 허나 사나다에게 그의 말이 쉬이 이해되지는 않았다. 분석이라는 것은 야쿠시고교가 별로 선택하는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사나다에게는.

궁금했습니다만.”

정보노출을 꺼리는 편도 아닌데다가 아라키와의 대화는 별로 정상적인 흐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템포로 따라가는 것을 놓친 사나다가 난색을 표하자 아라키의 입매가 얍실하게 곡선을 그린다.

사나다 슌페이.”

.”

꼴찌?”

사나다는 곧, 쓰고 있던 모자를 끌어내려 입을 덮었다. 맙소사,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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